런던 남동부, 템스강 남안에 자리한 조용한 지역 버몬지(Bermondsey)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주거지나 산업 유산의 공간이 아닙니다. 수제 맥주 애호가들 사이에선 이곳이 ‘브루어리 성지’로 통합니다. 오래된 철도 아치 아래를 따라 늘어선 수많은 수제 양조장들, 다양한 맛의 맥주가 흐르는 로컬 펍, 그리고 직접 양조한 신선한 맥주를 맛볼 수 있는 시음 투어까지 버몬지는 크래프트 맥주의 도시, 런던에서도 가장 감각적인 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맥주 애호가라면 반드시 경험해야 할 버몬지 브루어리 스트리트의 핵심 코스를 소개합니다.
브루어리 거리의 탄생과 구조
버몬지가 지금처럼 ‘맥주의 거리’로 변모하게 된 데는 특별한 배경이 있습니다. 과거 산업 철도망이 지나던 레일웨이 아치(Railway Arches) 구조가 남아 있었고, 2000년대 후반 들어 이 공간들이 점차 수제 맥주 양조장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양조장 운영에 필요한 냉각, 저장, 배관 등 설비가 이 곡선형 아치 구조에 적합했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임대료와 런던 도심 접근성도 장점이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버몬지는 작은 거리 하나에 20개가 넘는 양조장과 펍이 밀집된 지역으로 성장했습니다.
‘버몬지 비어 마일(Bermondsey Beer Mile)’이라 불리는 이 거리 코스는 런던 브릿지 역에서부터 시작해 사우스 버몬지까지 이어지며, 도보로 즐길 수 있는 완벽한 브루어리 투어 루트를 제공합니다.
로컬 펍과 양조장에서 마시는 한 잔의 감동
버몬지의 매력은 단순히 ‘맥주를 많이 마실 수 있는 곳’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곳의 진짜 매력은 바로 양조장 내부에서 직접 만든 맥주를, 만든 사람들과 함께 마실 수 있는 분위기입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The Kernel Brewery가 있습니다. 이곳은 버몬지 브루어리 붐의 시초가 된 양조장으로, 필터링을 최소화한 진한 IPA와 벨기에식 사워 맥주로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Anspach & Hobday는 비교적 젊은 분위기의 양조장으로, 전통 스타일 맥주에 현대적인 해석을 더한 라인업이 특징입니다. 이곳의 스모키 한 포터와 청량한 페일에일은 특히 평가가 높습니다. 마치 고대 양조소를 연상시키는 Partizan Brewing, 사워 에일 특화 양조장인 Brew by Numbers, 그리고 독창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Bianca Road Brew Co.까지 각 브루어리마다 시그니처 맥주와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서, 하나하나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시음 투어의 순서와 추천 동선
버몬지를 제대로 즐기려면 토요일 오후, 양조장 대부분이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 방문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전에는 런던 브릿지 인근의 버로우 마켓(Borough Market)을 구경하고, 점심을 간단히 해결한 뒤 Moor Beer Co.를 시작으로 남쪽 방향으로 걷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동선입니다. 이후에는 The Kernel Brewery → Brew by Numbers → Bianca Road → Fourpure 순으로 이어지는 루트를 추천합니다. 각 브루어리 간 거리가 짧아 도보 이동이 용이하고, 중간중간 개방된 야외 테이블이나 로컬 푸드 트럭도 있어 맥주와 함께 간단한 식사도 즐길 수 있습니다.
맥주 그 이상의 경험, 커뮤니티와 문화
버몬지의 양조장들은 단순히 술을 판매하는 공간이 아니라, 지역 커뮤니티와 연결되는 열린 문화 공간입니다. 어떤 곳은 주말마다 작은 음악 공연이나 아트 전시를 열고, 또 어떤 브루어리는 반려동물과 함께할 수 있는 가족 친화적인 공간으로 운영됩니다. 특히 현지 주민들과 관광객이 한 공간에서 자유롭게 어우러지는 모습은 이곳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다양한 언어,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하나의 테이블에 앉아 맥주 한 잔으로 대화의 문을 여는 이 풍경은, 단순한 음주를 넘어선 '경험'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버몬지를 찾는 사람들은 맥주만이 아니라 사람과 공간이 만든 기억까지 담아 돌아가게 됩니다.
버몬지는 맥주, 그리고 사람의 이야기
버몬지 브루어리 거리에는 단지 맥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는 열정을 담은 양조사의 손길, 골목의 분위기, 맥주 한 잔을 마시며 나누는 대화, 그리고 한 도시가 품고 있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함께 녹아 있습니다. 맥주를 좋아한다면, 아니 아직 맥주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버몬지는 런던에서 가장 사람다운 맛을 느낄 수 있는 코스입니다. 걷고, 마시고, 느끼며 하루를 보내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