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바다나 풍경보다 한 끼의 진심일지도 모릅니다. 특히 세부와 보홀에서는 음식이 단순한 맛을 넘어서 문화와 공동체의 일부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레촌의 고소한 향, 킬라윈의 생생한 식감, 망고의 달콤한 여운까지. 이 섬들은 한입 한입이 축복처럼 느껴지는 로컬 음식의 천국입니다.
세부의 자존심, 레촌의 향기와 가족의 온도
필리핀에서 '레촌(Lechon)'은 단순한 음식이 아닙니다. 특히 세부(Cebu)는 레촌의 본고장으로 불리며, '레촌은 세부에서 먹어야 진짜다'는 자부심이 있을 정도입니다. 통돼지를 숯불에 수 시간 이상 구워내는 이 요리는 가족과 마을 전체가 함께 만드는 축제 음식입니다. 세부 시내에만 해도 레촌 전문 식당이 수십 곳에 달하고, 대표적인 곳으로는 “Rico’s Lechon”, “CNT Lechon”이 있습니다. 지역마다 간이 조금씩 다른데, 세부의 레촌은 허브와 마늘, 레몬그라스 등의 향신료를 안쪽에 가득 채워 넣고 바삭하게 굽는 것이 특징입니다. 바깥 껍질은 캐러멜처럼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데 한입 베어 물면 입안 가득 기름의 풍미가 번지며 숯불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현지인들이 레촌을 먹는 분위기는 특별합니다. 파티나 생일, 졸업식처럼 가장 소중한 날에 먹는 음식으로, 식탁 중앙에 레촌이 올라오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웃음꽃이 핍니다. 나 역시 현지 친구의 초대에 따라 집에서 직접 손으로 찢어 먹는 레촌을 경험했는데, 진한 소스 없이도 깊은 풍미가 남아 며칠을 잊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여행자에게 레촌은 단지 '맛있는 고기'가 아니라, 필리핀 사람들이 기쁨을 나누는 방식과 정을 느끼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신선한 한 접시, 킬라윈에 담긴 섬의 바다
세부와 보홀에서는 회에 가까운 요리를 뜻하는 '킬라윈(Kinilaw)'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이 요리는 생선, 해산물, 때론 돼지고기를 식초와 칼라만시 주스로 익혀내는 전통 방식의 음식으로, 필리핀식 세비체(Ceviche)라 불릴 만큼 풍미가 깊습니다. 보홀에서는 해변가 근처 시장에서 방금 잡은 참치나 갈치를 직접 킬라윈으로 만들어주는 노점상도 많습니다. 특히 알로나 해변 근처의 ‘막막(Makmak)’ 노점에선 파파야, 양파, 생강을 함께 넣어 새콤한 감칠맛이 도는 킬라윈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음식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숟가락을 입에 넣는 순간, 입 안에서 터지는 생선의 담백함과 식초의 시원한 산미, 그리고 히니랭 같은 로컬 고추의 알싸한 매운맛이 강렬하게 ‘바다의 입맛’을 안겨줍니다. 특히 덥고 습한 날씨에 맥주 한 잔과 함께 곁들이면 이보다 완벽한 조합이 없죠. 보홀의 킬라윈은 세부보다 재료가 더 다양하고 현지화된 느낌이 강합니다. 어떤 곳은 과일을 함께 넣어 달콤한 뉘앙스를 주기도 하고, 집마다 마을마다 레시피가 다 다르다는 것도 이 음식의 매력입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을 수 있지만, 두 번만 먹으면 매력에 빠지고, 세 번 먹으면 다시 찾게 되는 맛, 그게 바로 킬러윈입니다.
그저 과일이 아니다 – 보홀 망고의 진짜 매력
필리핀 하면 빠질 수 없는 과일, 바로 망고(Mango). 하지만 보홀에서 먹는 망고는 진짜 다릅니다. 농장에서 바로 따서 당일 판매되는 이 지역의 망고는 설탕보다 더 달고, 부드럽고, 향이 짙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보홀 북쪽의 ‘산 미겔 지역’은 자연 그대로 재배한 유기농 망고 농장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현지 시장에서 ‘세 개에 100페소’ 정도면 믿기 어려운 퀄리티의 망고를 만날 수 있습니다. 색이 연하고 겉면이 덜 윤기 나는 것이 가장 달다는 현지인의 팁도 잊지 마세요. 망고는 그냥 먹어도 좋지만, 보홀에서는 ‘망고 피클’, ‘망고 디저트’, 그리고 코코넛과 함께 곁들인 로컬 간식으로도 즐깁니다. 특히 아침 시장에서 파는 ‘망고 스티키라이스’는 한입에 동남아의 풍미가 녹아든 별미입니다. 내가 처음 보홀 망고를 먹었던 날은 비가 오던 아침이었는데, 숙소 베란다에 앉아 수분 머금은 과육을 한입 베어 물었을 때의 감촉, 그리고 그날 하루 종일 입 안에 남은 단향은 아직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여행지의 맛은 단순한 식욕의 만족이 아닙니다. 기억에 남는 순간을 만드는 조용한 감정의 자극이고, 보홀의 망고는 그 조용한 감정을 놀라울 만큼 오래 머물게 해주는 과일이죠.
세부와 보홀에서의 식사는 ‘음식’이라는 단어만으론 부족합니다. 그건 기쁨을 나누는 방식이고, 지역의 자존심이며, 바다의 입맞춤이며, 자연이 주는 축복입니다. 레촌의 바삭함, 킬라윈의 산뜻함, 망고의 달콤함. 그 안엔 이 섬들이 가진 삶의 결이 녹아 있습니다. 여행은 끝나도, 그 맛은 마음속에 오래 남습니다. 그러니 세부와 보홀을 여행하게 된다면, 꼭 배고플 때 말고, 천천히 음미하고 싶을 때 한 끼를 드셔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