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를 여행하다 보면, 눈에 보이는 유적뿐만 아니라 그 속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에서 문화의 깊이를 느끼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춤, 음악, 조각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역사를 품은 몸짓과 손끝입니다. 이 글에서는 오늘날 캄보디아에서 어떻게 전통예술이 계승되고 살아 있는지, 그 구체적인 현장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조명해보려 합니다.
몸으로 기억되는 유산 – 전통 무용 ‘압사라’의 맥
캄보디아의 대표적 전통춤 ‘압사라’는 단순한 공연이 아닙니다. 그 춤 하나하나에 크메르 제국의 정신, 힌두 신화의 상징, 여성의 신성성 이 담겨 있습니다. 앙코르와트 벽면을 보면 수백 명의 무희가 새겨져 있는 압사라 부조가 보입니다. 이 부조는 9세기부터 존재해 왔으며, 오늘날까지 그 동작을 그대로 재현하는 무용이 전해집니다.
특히 손가락의 굽힘, 팔의 곡선, 눈동자의 흐름 하나까지 철저히 형식화되어 있어 춤이라기보다 의식에 가까운 행위로 여겨지곤 합니다. 프놈펜 왕립예술학교에서는 어린 학생들이 압사라를 배우기 위해 매일 아침 허리를 숙이고 거울 앞에서 손동작 하나를 수십 번씩 연습합니다.
나는 시엠립 외곽의 한 마을에서 열린 전통예술 워크숍을 참관하며, 15세 소녀가 "이건 단지 춤이 아니라, 할머니가 물려준 이야기예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 말처럼, 춤은 기억이고, 기억은 곧 문화입니다. 압사라 무용은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몸을 통해 역사를 다시 쓰는 작업입니다.
소리로 이어지는 정체성 – 전통 음악과 악기
춤과 함께 전통 음악도 캄보디아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전통 음악인 '핀피엣(Pinpeat)'은 사원 의식, 왕실 행사, 전통극에 사용되는 앙상블로, 크고 작은 공, 목관악기, 북, 실로폰류의 악기가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구성입니다.
그 음악은 기교보다는 반복과 리듬의 겹침, 그리고 천천히 고조되는 분위기로 마치 명상처럼 듣는 사람을 몰입하게 만듭니다. 시엠립의 한 사원에서는 주말마다 핌피엣 수업이 열립니다. 어린 소년들이 다리를 접고 앉아 연주를 반복하며 배우고, 중년의 스승이 "이 리듬은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방식으로 연주하라"라고 조언하는 모습은 단순한 교육이 아닌 세대 간의 정체성 전승임을 느끼게 합니다.
음악은 글로 적을 수 없는 감정을 전합니다. 특히 전통 음악은 말로 전하지 못한 슬픔과 희망, 신앙과 저항의 흔적을 소리로 기록합니다. 1970년대 크메르루주 정권 아래 전통예술이 거의 사라질 뻔했지만, 지금은 젊은 음악가들이 이를 복원하고 새롭게 작곡하며, 전통과 현대를 잇는 음악적 다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신성함을 빚는 손 – 불상 조각의 현재
캄보디아에서 조각, 특히 불상 제작은 여전히 살아 있는 예술입니다. 수많은 사원에서 볼 수 있는 불상들은 대부분 현지 장인들이 손으로 만든 작품이며, 지금도 각 지역에는 불상 공방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바탐방 지역의 한 조각 마을에서는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가 함께 조각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작업장은 흙먼지가 날리고, 나무망치와 끌이 부딪히는 소리가 끊이지 않지만 그 안에는 경건한 분위기가 흐릅니다. 조각을 시작하기 전, 장인은 향을 피우고 짧은 기도를 올립니다. “신의 얼굴을 빚는 일이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조각의 과정은 매우 느리고 세심합니다. 목재나 사암을 자르고 다듬고, 눈과 입, 손의 형태를 빚어내기까지 수 주의 시간이 걸립니다. 그 속도와 자세는 현대적인 효율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속엔 시간이 담긴 신념이 있습니다. 불상 제작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정신의 형태를 손으로 구현하는 일이며, 지금도 그 기술은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조용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통은 박제된 유물이 아닙니다. 춤추는 몸, 연주하는 손, 조각하는 도구 속에서 계속 만들어지는 생명입니다. 캄보디아의 전통예술은 오늘도 누군가의 몸과 손끝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의 계승은 문화유산이 아닌 문화의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리하여 여행자는 그저 바라보는 관람자가 아니라, 그 삶의 선을 따라 걷는 경청자이자 연결자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