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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놈펜에서 만나는 아픈 역사 코스 (기록, 증언, 흔적)

by l8m8l 2025. 6. 23.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은 한때 크메르 제국의 찬란한 문화와 프랑스 식민 시기의 유산이 공존하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이 도시는 세계 역사에서 손꼽히는 비극을 마주하게 됩니다. 폴 포트 정권하의 크메르루주가 자행한 집단학살로 수많은 생명이 희생됐고, 지금도 그 상처는 도시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여행자가 프놈펜에서 걸으며 직접 마주할 수 있는 아픈 역사 코스를 소개합니다. 기록과 증언, 흔적을 따라 걸으며 단순한 여행을 넘어 기억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프놈펜에서 만나는 아픈 역사

툴슬렝 학살박물관: 과거와의 직접적인 대면

프놈펜의 중심부에는 평범한 중학교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툴슬렝 학살박물관(Tuol Sleng Genocide Museum)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알려져 있습니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이곳은 크메르루주에 의해 ‘S-21’이라는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되었으며, 약 2만 명 이상이 고문당하고 살해되었습니다.

교실로 쓰이던 방은 감옥과 고문실로 개조됐고, 지금도 녹슨 침대와 수갑, 피가 묻은 바닥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벽면에 걸린 흑백사진은 수용 당시 찍힌 피해자들의 얼굴입니다. 그 표정은 말이 없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수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듭니다.

툴슬렝은 단순한 전시장이 아닙니다. 생존자들의 증언과 자료, 남겨진 문서는 우리가 역사적 사실을 피상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더 깊이 성찰하도록 유도합니다. 건물 안을 걷다 보면, 공기조차 무겁게 느껴지고, 그 고요함 속에서 한 시대의 광기와 그로 인한 고통이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킬링필드: 침묵으로 전하는 증언의 땅

툴슬렝에서 자동차로 약 30분 거리에 위치한 쭈엉 얙(Choeung Ek) 킬링필드는 크메르 루주에 의해 학살된 수천 명이 묻힌 집단 묘지입니다. 겉으로는 평화로운 들판처럼 보이지만, 땅 아래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유해가 남아 있고, 곳곳에 작은 표지판이 ‘이곳에서 몇 명이 죽임을 당했다’는 식으로 안내합니다.

중앙에는 유리로 된 큰 추모탑(Stupa)이 있고, 그 안에는 희생자들의 두개골과 뼈가 층층이 전시돼 있습니다. 숫자와 구조로만 접했을 땐 실감하지 못했던 죽음의 실체가, 눈앞에 펼쳐진 물리적 증거를 통해 강하게 다가옵니다.

킬링필드에서는 오디오 가이드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증언한 생존자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감정을 절제한 듯한 그들의 말투 속에 담긴 참담함은 여행자에게 말 없는 교훈을 전합니다. 고요한 자연 속에 남겨진 침묵의 증언, 그것이 바로 이 장소의 존재 이유입니다.

작은 흔적이 남긴 큰 울림, 프놈펜 시내의 표지들

프놈펜의 아픈 역사는 특정한 장소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시내를 걷다 보면 뜻밖의 벽화, 표지판, 기념비 등을 마주하게 됩니다. 일부 건물에는 당시 피해자들의 이름이 적힌 작은 동판이 붙어 있고, 거리의 벽화에는 기억과 화해, 회복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그려져 있습니다.

프놈펜의 중심부에 위치한 인권센터(Cambodian Center for Human Rights), 메모리 투어 프로그램, 청소년 역사 교육 전시관 등은 크메르 루주의 과오를 잊지 않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프놈펜 왕궁이나 시사켓 거리 등 겉보기에 화려한 지역조차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과거의 흔적이 겹쳐져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기억 지도처럼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여행자는 어느 골목을 걷더라도, 단지 걷는 것이 아니라 기록 위를 디디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됩니다.

프놈펜은 과거와 마주하는 용기를 주는 도시

프놈펜은 아픈 과거를 감추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가는 도시입니다. 툴슬렝과 킬링필드, 그리고 거리 곳곳에 남겨진 작은 기억들은 단순히 슬픔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과 사람의 회복력을 보여줍니다.

이 도시는 말하지 않아도 깊이 전해지는 감정을 지녔습니다. 역사를 통해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프놈펜에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여행자의 발걸음이 머무는 곳마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조용한 성찰의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